무위심상의 산수, 시간을 그리는 먹 전제창의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이미지가 생성되도록 기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전통적인 먹이라는 재료를 사용하되, 그것을 화선지 위에 올리기보다 현대적 회화의 기반인 캔버스 위에 펼친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동양적 회화 언어와 서양의 재료적 토대를 교차시키며, 회화의 표면성과 물성에 대한 섬세한 사유를 담아낸다. 그의 화면 위에서는 붓질보다 물의 흐름과 먹의 스밈, 마르며 남겨지는 얼룩과 층위가 주된 형식을 이룬다. 그렇다고 형상은 철저히 해체되지 않고 자연의 대상을 화면의 물성에서 시간과 침전을 통해 태초의 산수를 찾아낸다. 그것은 엄격히 인공적 구성이 배제된 자리에 자연적 시간과 재료의 우연성이 개입된 이미지의 흔적들이 남는다. 이는 캔버스 밖의 사물의 묘사나 명확한 풍경의 제시가 아니라, 재료와 표면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자율적인 이미지의 출현이다. 작품을 마주한 관람자는 어떤 익숙한 자연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으나, 이내 그것이 존재하는 장소나 기억으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제창의 화면은 구체적 대상이 아닌 ‘감각의 기억’, 혹은 ‘기억의 감각’에 가까운 인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이나 물, 안개와 같은 자연적 이미지들이 직관적으로 환기되지만 그것은 형태가 아닌 감각의 촉각적 요소로 인하여 인식된다. 마치 꿈속에서 자연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만지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작가가 풍경을 직접적으로 재현하거나 상징적으로 구성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히려 전제창은 자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료의 물성을 따르고, 그 과정을 존중한다. 그는 캔버스 위에 물과 먹을 얹은 후, 그것이 번지고 스며드는 과정을 지켜보며, 특정한 형태가 우연히 떠오르거나 서서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린다. 이러한 태도는 회화의 전통적 개념인 ‘그림을 그리는 자의 의지’보다는, ‘이미지가 스스로 드러나는 과정’에 대한 신뢰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전제창의 회화는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감각의 작용이 고스란히 스며든 물질로서의 회화로 작동한다. 즉, 그의 작업은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물질’이다. 먹이라는 매체가 지닌 깊이와 캔버스 표면의 저항감, 그리고 수분이 만들어내는 흔적들은 화면 위에서 감각과 물질이 맞닿는 접면이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이미지의 내면이 아닌, 그것의 물리적 조건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러한 작업 세계는 전제창이 회화를 단지 표현의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회화는 그의 손을 통해 세상의 풍경을 묘사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생성되고 감각되는 풍경이 된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은 말보다 느리고, 설명보다 깊은 층위에서 감상자와 마주한다. 그것은 찰나의 장면처럼 정지되어 있으면서도, 태초의 흔적을 머금은 자연물처럼 고요히 다가온다. 특히 그의 일관된 모노톤과 어두운 색조는 단순한 형식적 선택이 아니다. 그는 설명하지 않지만, 삶의 결이 고스란히 화면에 배어 있다. 젊은 시절의 색채는 마치 한때 꿈꾸던 지중해의 햇살처럼 찬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검은 먹과 어둔 회색 속에서 침묵과 고독의 빛을 찾는다. 눈부신 풍경보다 삶의 진실이 자리하는 곳은 니체가 말한 ‘깊은 우물 속 고요한 물’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고통이나 절망이 아니라, 한 인간이 고요히 지나온 시간의 침전물이며, 그래서 더 깊고 단단하다. 전제창의 회화는 보이기 위한 형상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형상이다. 그것은 삶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 비로소 드러나는 조용한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슬프고 무채색이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를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감정과 절제된 희망의 결이 함께 숨어 있다. 작업은 그에게 있어 순간순간의 순수함을 투영하는 행위이며, 고요히 쌓인 형상은 그 순간들의 정직한 기록이다. 전제창의 화면은 설명을 거부한다. 그 대신 물질의 층과 시간의 결을 통해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회화는 그에게 있어 사물도 풍경도 아닌, 살아 있는 침묵의 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몸을 바라보며, 삶이란 반드시 소리를 내지 않아도 깊이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